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어릴 적 저는 정말 깊이 자는 아이였습니다. 오빠들이 캠핑을 가고 부모님도 앞집 모임에 가신 어느 날, 졸려하는 동생을 데리고 집에 돌아와 TV를 보다 같이 잠들어버렸습니다. 늦은 밤 돌아오신 부모님이 문이 잠긴 걸 보고 몇 시간을 제 이름을 부르며 문을 두드리셨다는데, 저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습니다. 결국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화장실 창문을 깨고 들어오셨다는 이야기를 나중에야 들었습니다. 고등학생 때도 마찬가지로, 틈만 나면 책상에 엎드려 세상모르게 잠을 잤었답니다.
그런데 20대 초반부터 불면증이 시작됐습니다. 약도 먹어보고 병원 상담도 여러 번 받았지만, 그때마다 잠깐 나아지는 듯하다 다시 제자리였습니다. 대학을 나오고 직장 생활을 하며 실내에서만 지내다 보니 햇볕 볼 일도 거의 없었고, 스트레스의 성격도 학창 시절과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. 잠은 늘 고민거리였습니다. 하지만...
'꿈 없이 한 번도 안 깨야 잘 잔 것'이라는 믿음 자체가 처음부터 틀린 기준이었다는 걸, 이번에 자료를 찾아보며 한참 뒤에야 알게 됐습니다.
수면 오해 — 꿀잠의 기준이 처음부터 잘못됐다
저도 오랫동안 그렇게 믿었습니다. 자다가 한 번도 깨지 않을 것, 꿈을 꾸지 않을 것, 아침에 상쾌하게 눈뜰 것. 이 세 가지를 다 충족해야 '제대로 잔 것'이라고요. 그런데 20년간 수면클리닉을 운영해온 전문의의 설명을 접하고서, 그 기준 자체가 초등학교 저학년 이후로는 거의 실현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습니다.
핵심은 렘수면(REM sleep)입니다. 렘수면이란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면서 꿈을 꾸는 수면 단계를 말합니다. 전체 수면의 약 25%를 차지하는 정상적인 과정이기 때문에, '꿈이 없는 잠'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깝습니다. 렘수면을 억제하는 약을 장기 복용하면 오히려 기억력이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(출처: NIH PubMed Central). 저는 자다가 깬다는 사실 자체를 늘 문제라고만 여겼는데, 그 기준 자체가 잘못됐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이번에 처음 해봤습니다.
술에 대한 오해도 짚고 싶습니다. 저도 많이 마신 날엔 술기운에 바로 곯아떨어지곤 했는데, 이상하게 꼭 새벽에 깨는 일이 잦았습니다. 이유가 있었습니다. 알코올은 초반 한두 시간 동안 렘수면을 억제해서 꿈 없이 깊이 자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다가, 한 시간쯤 지나면 억제됐던 렘수면이 반동적으로 몰려옵니다. 렘수면 동안에는 근육의 힘이 빠지는 이완 현상이 일어나는데, 수면무호흡증이 있는 경우 이 시점에 호흡이 더 나빠져 숨이 막혀 깨는 일이 잦습니다. 단기적으로는 이렇게 잠을 방해하고, 장기적으로는 음주 총량이 뇌의 각성-수면 균형 자체를 무너뜨립니다. "처음엔 한 잔으로 잘 잤는데 점점 양이 늘어난다"는 흔한 패턴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.
수면제에 대한 이분법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. 불면의 원인이 생활습관에 있다면 습관 교정이 우선이고, 원인이 다른 데 있다면 약이 필요한 경우도 분명히 있습니다. 좋은 약과 나쁜 약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, 원인에 맞게 쓰느냐의 문제입니다.
나이보다 먼저 오는 수면의 변화
제가 20대 초반부터 잠이 달라진 이유를 한동안 스트레스 탓으로만 돌렸습니다. 그런데 자료를 찾아보니, 멜라토닌(melatonin) 분비량 변화가 상당히 큰 원인이었습니다. 멜라토닌이란 뇌의 송과선에서 분비되어 수면을 유도하고 유지하는 호르몬입니다. 규칙적으로 자는 사람 기준으로 취침 두세 시간 전부터 분비가 시작돼 밤새 높은 수준을 유지하다 아침에 급격히 떨어지는데, 이 분비량 자체가 나이에 따라 크게 줄어듭니다 (출처: Sleep Foundation).
20대의 분비량을 100으로 보면 50대에는 50, 80대에는 25 수준까지 떨어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. 다만 이 수치가 개인차 없이 모두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고정값인지, 평균을 단순화한 것인지는 불분명했습니다. 같은 나이대라도 수면의 질이 크게 다른 사람들을 주변에서 봐왔기 때문에, 이 수치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"나이 들수록 어려워지는 방향성" 정도로 이해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.
두 번째는 근력입니다. 수면은 하룻밤에 90~150분 길이의 수면 사이클이 3~5회 반복되는 구조인데, 이 사이클과 사이클 사이가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으면 조각잠으로 이어집니다. 근력이 떨어지면 이 연결 고리가 약해진다고 하니, 나이와 무관하게 평소 근력이 부족한 사람도 조각잠을 더 자주 겪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.
각성 역치(arousal threshold)도 중요한 개념입니다. 잠에서 깨는 데 필요한 자극의 최솟값을 말하는데, 이 수치가 낮아질수록 사소한 소리나 움직임에도 쉽게 깹니다. 저는 제가 그냥 예민한 성격이라서 잘 깬다고만 생각했는데, 수면의 질이 낮아지면 각성 역치 자체가 떨어진다는 걸 알고 나서 조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. 새벽에 화장실을 가는 것도 방광이 꽉 찼기 때문이 아니라, 얕은 잠에서 먼저 깬 뒤 '화장실이나 가자'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.

오늘부터 다르게 할 수 있는 것
가장 먼저 시도해본 건 걱정 노트였습니다. 자다 깨서 잡생각이 많을 때, 침대에서 나와 어두운 조명 아래 그 걱정을 종이에 적는 방법입니다. 머릿속으로 떠올릴 때와 글로 적었을 때의 무게감이 다르다는 게 핵심인데, 처음엔 열 가지씩 적히던 걱정이 반복할수록 줄어들었습니다.
취침 전 공복 시간도 중요합니다. 최소 3~4시간의 공복을 유지해야, 늦은 시간 음식으로 소화기관이 활발해져 뇌가 절반만 잠드는 상황을 피할 수 있습니다.
수면 자세도 짚어볼 부분입니다. 가장 권장되는 자세는 똑바로 누운 자세이고, 옆으로 자는 습관은 비염이나 수면무호흡증 때문인 경우가 많으며 어깨 통증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. 엎드려 자는 자세는 목과 허리에 부담을 줘 피해야 할 자세로 꼽힙니다.
자주 묻는 질문
Q. 꿈을 많이 꾸면 잠을 못 잔 건가요?
A. 아닙니다. 렘수면은 전체 수면의 약 25%를 차지하는 정상 과정이라, 꿈은 누구나 꿉니다. 단지 기억하지 못할 뿐입니다.
Q. 술 한 잔이 수면에 도움이 된다는 게 정말 사실인가요?
A. 잠드는 속도를 빠르게 해주는 건 맞지만, 이건 알코올이 렘수면을 초반에 억제하기 때문에 생기는 착각에 가깝습니다. 한 시간쯤 지나면 억제됐던 렘수면이 반동으로 몰려오면서 오히려 새벽에 깨게 됩니다.
Q. 수면제는 무조건 피해야 하나요?
A.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건 정확하지 않습니다. 불면의 원인이 생활습관이라면 습관 교정이 먼저이고, 원인이 다른 데 있다면 약이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.
Q. 자다가 새벽에 화장실을 자주 가는 게 방광 문제인가요?
A.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. 각성 역치가 낮아져서 얕은 잠 상태에서 먼저 깬 뒤, '화장실이나 가자'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.
결론
수면 문제로 힘들어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릅니다. 주말마다 몰아 자는 사람, 꿈에 시달린다며 못 잤다고 느끼는 사람, 저처럼 작은 소리에도 깨는 사람까지. 그런데 이번에 정리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건, 많은 경우에 기준 자체가 잘못 설정돼 있다는 점이었습니다.
'꿈 없이 한 번도 안 깨야 잘 잔 것'이라는 기준을 놓아버리고 나서, 수면에 대한 불안이 조금 줄었습니다. 그다음 단계는 내 수면에서 실제로 무엇이 문제인지를 파악하는 것입니다. 멜라토닌 감소인지, 근력 부족인지, 생활습관인지, 아니면 다른 원인인지. 남들과 같은 기준으로 내 잠을 재단하기보다, 내 몸의 패턴을 먼저 들여다보는 것이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.